본문 바로가기

Daily

(77)
어느 12월의 극장 만약 이곳이 뉴욕 브로드웨이의 어느 극장이거나 파리의 바스티유 극장이거나 하면 이 장면은 뉴요커나 파리지앵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그런대로 설득력 있는 풍경일까. 왠지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그곳이 아닌 이곳에 살고 있어서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들 앞에 굳이 지정학적 수사를 붙인 후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인 것처럼 감정이입 하는 것이 의외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에 놀라곤 한다. 나에게 이런 장면은 명백히 올가 혹은 옐레나, 아그네, 그레타 같은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샤바의 쇼팽 연주회에서 마주르카를 연주하던 피아니스트도 그렇다. 이들 모두를 가둬 버리는 아주 깊고 넓고 차가운 호수가 있다. 파리에서의 1년에 대한 향수를 호소하며 꿈에 젖던 하얼빈의 러시아어 시간 ..
12월의 무라카미 류 12월 31일에 무심코 부엌 바닥에 흘린 밥풀을 하루 지나서 1월 1일에 밟았다고 치자. 슬리퍼에 눌어붙은 밥풀이 알아서 떨어질 리 없으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일 위 여기저기에 끈적한 흔적을 남긴다. 고작 식은 밥풀 하나가 정말 이렇게 끈질기게 찐득 거릴 수 있다니 탄복할 즈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리퍼를 벗어서 하루 만에 4배의 크기로 짜부라진 '작년의 밥풀'을 그렇게 뜯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겨울인데 마치 지난겨울처럼 느껴지는 작년의 겨울 몇 장면을 떠올린다. 더 늦기 전에. 12월 초에 예상치 못한 책 소포를 받았다. 이웃님께서 여행중에 읽으시려고 가져간 책들을 다 읽으시고 빌니우스로 보내주신 것이다. 게다가 이 초경량 귀염뽀짝한 무라카미 류의 책은 또 너무나 의외였다. ..
지난 12월의 차 24잔. 11월 초에 친구가 보내온 어드벤트 달력. 푸카차는 클리퍼, 요기차와 함께 내가 좋아하고 즐겨 마시는 허브차인데 성분이나 성격에 있어서 서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확고한 차이가 있어서 몇 종류씩 사놓고 번갈아가며 마신다. 보통은 그날을 정리하는 의미의 마지막 차로 자기 전에 마시곤 했는데 12월엔 주로 아침 시간에 마셨다. 이건 아마 전 날 저녁에 먹다 남은 버섯을 팬 채로 그래도 데우다가 달걀 추가해서 먹은 아침이다. 마지막달 12월이 보통 그렇지만 역시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는 빨리 흘러간 것 같다. 작년 12월엔 눈이 정말 많이 왔고 크리스마스까지 점점 어두워지는 경향에 발맞춰 유난히 몸과 마음이 정말 느리고 고요하게 점점 가라앉으며 평온해지는 상태가 되었다. 눈 덕분에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12월의 11월 연극 회상 술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왜 마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빈도로 마시고 싶다. 그러려면 좀 뜸하게 마셔야 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종이어도 명확하면 된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술을 대하는 자세와 감성은 또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긴 채로 나와는 다르겠지만 애주가의 영혼과 체질을 가지지 못한 나로선 딱 그 정도가 좋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연극보기 전에 진 한 잔을 마셨다. 술을 정말 거의 마시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대략 이렇다. 드라마의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즌의 내용을 잠깐 되짚어 줄 때 내 기억들이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재빠르게 되감겨 들어가며 수렴될 때의 느낌이 있다. 눈앞에 놓인 한 잔의 술이 바로 이전 술의 맛과 향과 추억을 마치 방금 전에 마신 것인 양 아주 명료하..
여름, Vasara, Лето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 1일은 가을의 시작이다. 단지 달 앞의 숫자가 바뀔 뿐인데 어제의 여름이 보란 듯이 지난여름으로 재빨리 치환되는 것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방금 끌어올린 그물 속에서 아직은 상처 나지 않은 채 팔딱거리는 이 여름의 기억들을 어떻게 하면 영원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까. 아직은 8월일 때 느긋하게 회상하고 싶었던 여름인데 가을이 급히 들이닥칠 것을 알았으면서도 또 늦어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느낌이 유난히 그득했던 지난여름. 여름, Vasara. Лето. 타인의 기억을 열처리하고 통조림해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감정 하나를 남겨준다는 것. 어떤 음악들. 노래하는 사람들. 어떤 영화들. 그들에겐 왕관을 씌워줘야 한다.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히페르볼레 Hi..
랍상의 기억 예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아마 제목과 포스터가 풍기는 오페라의 유령스런 느낌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로도 극복하기 힘들었는지 계속 손을 대지 못하다가 한 달 전에 보게 된 영화. 팬텀 스레드. 영화를 보는 내내 여타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들을 떠올리며 감춰진 스타일의 접점을 찾으려고 꽤나 애를 썼지만 그러진 못했다. 그 이유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대사나 표정 그리고 옷차림을 구경하는데 그저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미국색이 팽배한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생각하니 그저 자신의 전작을 빛내준 영국인 명배우에게 헌정한 영화란 느낌마저 들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냥 다니엘 데이 루이스일 뿐이구나. 알 파치노만큼 나이가 들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영화 초반에 식당에서 꽤 까다롭게 아..
피렌체 두오모를 빠뜨린 파스타 마트에 나타난 건축물 파스타. 어린이용으로 동물 파스타 , 알파벳 파스타 뭐 많지만 이런 건 처음 봤다. 약간 거래처에서 재고 소진하려고 강압적으로 판촉 해서 마트에 들어선 듯한 이런 반짝 제품들은 실제로 진열된 양만큼 다 팔리면 더 안 나오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사서 먹어본다. 그런데 피렌체 두오모 버젓이 그려놓고 두오모는 없다. 역시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파스타로 구현해내기는 만만치 않았나 보다. 할아버지 창업자의 숙원 사업이었던 건축물 파스타를 손자가 기어코 만들어낸 느낌이긴 하지만 뭔가 이런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생산 라인 새로 만드는데 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콜로세움까진 어떻게 해보겠는데요 할아버지. 두오모는 정말 불가능해요.'. '네 아비도 그런 소릴 했지. 콜록콜록, 아니 두오모 속..
의복순례 파블로바 먹은 날인데 아마. 진짜 오랜만에 중고 옷가게 한바퀴를 돌았다. 역시 즉시 재채기 시작. 그래도 이 날 득템한 자켓을 날씨가 좀 추워진 틈에 신나게 입고 다녔다. 날씨 또 더워졌지만 금방 추워지겠지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