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에 무심코 부엌 바닥에 흘린 밥풀을 하루 지나서 1월 1일에 밟았다고 치자. 슬리퍼에 눌어붙은 밥풀이 알아서 떨어질 리 없으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일 위 여기저기에 끈적한 흔적을 남긴다. 고작 식은 밥풀 하나가 정말 이렇게 끈질기게 찐득 거릴 수 있다니 탄복할 즈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리퍼를 벗어서 하루 만에 4배의 크기로 짜부라진 '작년의 밥풀'을 그렇게 뜯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겨울인데 마치 지난겨울처럼 느껴지는 작년의 겨울 몇 장면을 떠올린다. 더 늦기 전에.
12월 초에 예상치 못한 책 소포를 받았다. 이웃님께서 여행중에 읽으시려고 가져간 책들을 다 읽으시고 빌니우스로 보내주신 것이다. 게다가 이 초경량 귀염뽀짝한 무라카미 류의 책은 또 너무나 의외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키득거렸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많이 웃었다. 통찰에 공들인 흔적이 적은 수필이어서 좋았고 누군가가 콤플렉스 없이 드러내는 밝고 화사한 이야기 어서도 좋았는데 읽는 동안 허전한 마음도 계속 들었다.
그것은 아마 이 책이 엄밀히 말하면 작가의 지난 여행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채워져있고 또 누군가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남기고 가는 책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해외로 이적한 축구 선수와의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그 에피소드를 뚫고 나오는 두 사람의 무뚝뚝하면서도 따뜻한 연대와 우정이 아련함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질척거리지 않고 재빠르게 주제들이 전환되는 문장 사이에 은근히 스며들어 있는 애정과 미련 같은 게 느껴졌달까.
가장 웃긴 것은 작가가 써내려간 문장을 따라가며 작가의 과거 쇼핑 이력을 떠올리기보단 지금도 어디선가 돈을 쓰고 있을 작가의 모습을 계속 상상했다는 것. '쇼핑 에세이인데 소설 쓰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면서 쇼핑 에세이 장르 개척자의 궁색한 설명을 듣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가끔씩 책을 펼쳐본다. 눈을 감고 어딜 펼쳐봐도 너무 일관적이여서 부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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