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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오래된 집

 

 

 

 

어떤 러시아 소설들 속의 집. 층계참에 난 현관문을 통한 복도들이 있고 그 복도를 지나면서 이웃들의 모습을 훔쳐볼 수 있고 필요하다면 문이 열린 그 복도로 들어서서 재빨리 몸을 숨길수도 있을것이다. 커피를 가져다주는 하녀가 딸린 임대료 몇 루블의 어떤 집들. 누군가는 새로 산 외투를 부여잡고 행복감에 젖기도 했고 몇 푼 안되는 집세를 못내서 경찰과 함께 주인이 들이닥치기도 했던 그런 집들. 그런 장면들을 떠올리게끔 하는 주택들이 빌니우스에도 많이 남아있다. 어두운 계단의 초입에 길쭉하고 투박한 철제 우편함이 쪼르륵 붙어있고 두가지 색으로 이등분해서 칠해진 건물 내부 바닥에는 군데 군데 벗겨진 페인트칠이 나뒹군다. 나무 바닥은 여지없이 삐걱거린다. 타다만 장작 냄새, 벽난로에 걸쳐져서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련 시절에 생산된 단조로운 패턴의 베갯잇, 높고 휑한 천장에 붙어있는 부스러진 석고 장식, 어중간한 파스텔톤의 벽지, 그리고 그 위에 액자를 한 듯 걸려진 터키식 카페트. 그리고 어느 구석즈음엔 이콘 혹은 성모 마리아상이 놓여있다. 오늘 우연히 찾아 간 집. 층계참에 난 공동의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것은 복도에 놓인 장롱에 걸려진 바스네초프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어떤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년전 벨라루스에서 빌니우스로 넘어 왔다는 폴란드 여인의 방에 걸려있던 것은 쉬쉬킨의 풍경화였다.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정교의 크리스마스였다. 종종 19세기의 러시아에서 태어났더라면 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한다. 해가 긴 여름날 저녁 저기 저런 나무 밑에서 한나절 낮잠을 자고 돌아다녀도 자비로운 주인을 둬서 매질을 맞지 않았을 운명이었더라면 참 좋았겠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엎드려자는 내 등을 토닥하거리며 이반 왕자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손수건을 뒤집어 쓴 사려깊은 여인이 내 할머니였어도 좋았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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