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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의 책


작년에 리투아니아어로 번역되어 나온 타르코프스키의 책을 찔끔찔끔 읽고 있다. 이런 책은 사실 진도가 잘 안 나가지만 그나마 처음부터 순서대로 쭉 읽어야 하는 부담감이 없어서 단어 사냥한다 생각하고 하루에 한 페이지씩이라도 읽는데서 보람을 느끼려고 한다. 특히나 이 책은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처음에 얼핏 본 표지가 너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인데 이 영화 자체는 나의 베스트라고 할 수 없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눈으로 한컷 필터링된 이탈리아를 감상하는 매력이 있다. 많은 감독들을 좋아하지만 그 작품들은 보통은 그들의 연출작이라고 일컫게 되는데 유독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은 그의 유산이라는 개념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각각의 작품들이 서로 겹치거나 반복되는 인상이 없이 구성도 느낌도 다르고 뭔가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는데 너무 세상을 빨리 등진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다. 누군들 영화 한 편을 쉽게 만들겠느냐마는 그의 영화들은 특히 보고 나면 정말 고통스러운 창작 과정을 거쳐 만든 작품이란 인상을 받는다. 게다가 그 특유의 위압적이고 결벽적인 움직임들에 무기력하게 이끌려 가지만 어떤 장면에서 멈춰도 그 모습은 시적이고 아름답다는 것, 정물이 풍경이 되고 풍경이 또 정물이 되며 그것은 비극을 구현해내는 그 작가의 탁월한 수단같다.

이 책에는 인생과 영화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단호하면서도 의외로 다정한 어조로 적혀있다. 동료 거장 감독들에 대한 애정도 느껴지고 감독 자신의 취향에 빠져있는 순수함과 솔직함도 엿보인다. 남긴 작품에 대한 촬영 비화도 물론 빠지지 않는데 영화 속에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가 가장 많아서인지 '거울'에 대한 언급이 월등하게 많다. 거울은 사실 제일 힘들게 본 영화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안드레이 류블료프'나 '스탈케르'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았으면 좋았다 싶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언급도 있었는데 특히 내가 그나마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 유일하게 좋아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반 페이지나 할애한 것이 의외였고 반가웠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읽는 동안은 영화의 어떤 장면들이 타르코프스키의 문장을 뚫고 나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문체에서 내가 보았던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읽는 내내 모종의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픈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가 아나톨리 솔로니친을 그립다고 하는 부분에서 가장 그랬다.

읽은 중에 아마도 요즘 상황과 연관짓다보면 인상적인 문단이 있어서 옮겨 보았다. 리투아니아에 뿌리를 내린 러시아인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성향과 생활 방식에 대해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던 것을 어떤 러시아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명료하게 단번에 정리해준 느낌이다. 그것엔 변명이나 자기 방어의 뉘앙스는 없으며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런 우리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 특유의 어조가 느껴진다. 존재하는 동안은 러시아는 결국 러시아로 남을것이다. 그러니 존재 그 자체를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고국을 멀리 떠나 온 우리 러시아인들이 맞닥뜨리는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영혼의 상태로서의 러시아적인 향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그들의 운명이 어디에서 결정지어지는가와 상관없이 자신의 뿌리와 과거, 자신의 문화와 고향과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우리 러시아인들이 평생 짊어지고 다니는 숙명적인 애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소수의 러시아인들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삶을 재정비해서 살아간다. 대대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이민 역사는 융화에 서투르고 적응하려는 시도조차 힘겹고 어설픈 것으로 유명한 우리를 향한 '러시아인은 형편없는 이민자'라는 서방의 우스갯소리를 증명한다.'

'모든 작품속에서 나에겐 부모님의 집들과 어린 시절, 나의 조국과 대지와의 관계 같은 뿌리에 관한 테마가 중요했다. 나에겐 전통과 문화 그리고 인류와 사상의 굴레에 종속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 항상 중요한 일이었다. 나에겐 현대 러시아에선 본질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뻗어 나온 러시아 문화의 전통이 특히나 중요했다. 이 전통들은 종종 무시되거나 심지어 잊히기까지 한다. 그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물질주의에 대해 이 전통이 고수하는 원칙적인 적대감 때문이다. 모든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이 겪었고 도스토예프스키 그 자신의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에 영감을 준 영적인 위기에도 주목해야 한다. 왜 현대 러시아에선 이런 영적 위기 상태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영적인 위기를 통해서만 건강에 눈 뜰 수 있고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신념을 얻을 수 있다. 영혼은 늘 조화를 갈망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대립은 오히려 움직임의 원동력이자 우리가 겪는 고통과 희망의 원천이며 우리의 영적 깊이와 영적인 가능성에 관한 확증이다.'

요즘 리투아니아로도 폴란드와 몰도바만큼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지금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적인 것, 슬라브적인 것들의 이동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뿌리내리느냐와 상관없이 그들은 결국 더 먼 곳으로 향하고 있다. 요새 시류에 편승해서 우크라이나어 강좌도 생기지만 당장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이곳 사람들이 소통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뭘까 생각해보면 결국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러시아어와 관련된 문제가 전쟁의 여러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을 생각하면 또 뭔가 아이러니하다. 마트 선반에서 러시아 브랜드 홍차를 들어내면 립톤으로 꽉꽉 채우면 그만이고 극장 이름에서 혐오의 대명사가 된 지명 하나 지워내는 것 크게 어렵지 않겠지만 오랜 세월 차곡차곡 뿌리내려 심지어 그게 어디쯤에 얼마큼 깊은 곳까지 들어차 있는지 알기 힘든 것을 없애 나가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이며 또 필요한 것인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계속 묻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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