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가량으로 짧게 편집된 오스카 시상식 하이라이트를 보았다. 예전만큼 패기 있게 내려가진 않았지만 여전히 반쯤 내려간 바지를 입은 에미넴이 거짓말처럼 스쳐 지나간다. 눈 앞의 오스카는 페이드 아웃되고 공연 전체 영상을 보며 이제는 세상에 없는 브리트니 머피와 함께 한 그의 영화 8마일을 추억하기 시작했다. 나름 베스트 음악상 수상자인 에미넴이다.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람들 앞에 선 그의 공손한 공연을 그마저도 거의 졸면서 보고 있는 마틴 스콜세지와 열심히 그루브를 타는 갤 가돗 사이의 세대적 괴리만큼이나 18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 사이의 거리는 8000마일쯤은 되어 보였다.
힙합팬이 아니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영화, 흑인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는 힙합씬에 혜성처럼 나타난 말끔한 백인 아이. 오스카 시상식은 언제나 역시 잘 짜인 각본처럼 타인종과 타문화에 배타적으로만 보이는 우리 백인이지만 우리도 어떤 분야에서는 차별과 편견을 딛고 일어선다는 뒤끝 있는 메시지를 에미넴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퍼튜니티를 외치는 에미넴의 위로 느닷없이 겹쳐지는 것은 에단 호크가 연기했던 쳇 베이커의 전기 영화 Born to be blue 였다.
날고 기는 흑인 재즈 뮤지션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던 백인 연주자. 그는 찰리 파커에게 선택되었고 전설적인 마일스 데이비스와 경쟁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음과 동시에 그들을 능가하고자 하는 마치 금기시된 욕망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그 피 말리는 연주 인생을 맨 정신으로 살 수 없었는지 그는 트럼펫에 대한 열정만큼의 노력을 헤로인 복용에 쏟아부었던 대책 없는 약물 중독자이기도 했다. 사생활은 엉망이었다. 얻어맞아서 앞니가 전부 나가버린 상황에서도 말 그대로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광기로 핏물을 뱉어가며 트럼펫을 불었던 서부 재즈의 대명사.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그것'의 존재와 가치와 환희를 이미 알아버린 사람들이 늘 그랬듯이 그는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을 상처 내며 그의 삶을 살아낸다. 그리고 그의 음악과 그것을 연주하는 그는 결국 남았다.
재즈와 블루스 하면 흑인들의 정서가 깊게 서린 음악이라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끝 모르고 이어지는 즉흥 연주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오히려 그 슬픔에서 해탈한 기쁨의 정서를 전달받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한다. 그런데 쳇 베이커의 연주와 노래는 방구석에 처박힌 한창 예민한 시기의 사춘기 학생이 읊조리는 멜로디처럼 대책 없이 슬프고 나른하다.마치 흑인들이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재즈 부심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백인의 한이 주체할 수 없는 우울로 변이 된 느낌마저 준다.
도무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은 인생을 사는 사람. 한 가지만 미친 듯이 할 수 있도록 놔두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어떤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한다는 일종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인생은 알다시피 평탄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힘겨운 건 그런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인생에 함께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의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데 치러야 하는 대가에서 대부분의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당장 가질 수 있는 것들에 보다 길들여져 있고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삶에서 예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배고픔을 감수하고 뭔가에 올인하려는 순간에는 과연 이 재능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 자신도 음악을 좋아했고 재능이 있었지만 대공황에 맞서서 가족을 부양하기위해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들을 전전했던 쳇 베이커의 아버지. 아버지를 통해 음악을 배운 쳇 베이커는 그 누구보다 늘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이뤄낸 예술가 아들에 대한 질투심이 컸는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냉랭했다. 모두가 들어서 아는 위대한 음악을 남기진 못했지만 약에 취해 사는 아들과 달리 가정을 지켜냈다는 사실 하나로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위로한다. 그것이 자조인지 자부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늘 던지는 질문이다. 어떤 인생이 행복한 인생일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줄곧 살아가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데 사용하는 그 가치들은 과연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가치일까?
어떤 역도 독자적인 해석으로 소화해내는 배우 에단 호크. 은근한 다작 배우인데 90년대부터 2000년대를 지나온 그 또래의 배우들 사이에서 아마도 거품이 가장 적은 배우. 그의 모든 영화가 볼 만하다는 것은 그가 대단한 연기파 배우여서라기보다는 작품 선택에 많은 공을 들이기 때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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