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lm

바이킹스 시즌 6을 기다리며 잡담



3일 간의 짧았던 베르겐 여행.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웠던 베르겐의 기운이 아직 콧잔등에 남아있는 채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보기 시작한 히스토리 채널 드라마 바이킹. 베르겐의 날씨, 하이킹하는 동안 밟았던 이끼 낀 바위산 그리고 어둑어둑해지는 평평한 산 정상으로 불어오던 날카로운 바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생각났다. 실제로 얕은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베르겐은 드라마의 배경이자 인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노르웨이의 군소 왕국의 지배자들도 호시탐탐 노리는 노르웨이 바이킹의 거점 도시, 카테가트와 거의 동일했다. 베르겐은 13세기에 노르웨이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보다 훨씬 이전의 바이킹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부터 수백 척의 배들이 그 항만을 빠져나가 지금의 영국으로 프랑스로 발트해 연안에 닿았을것이다. 때로는 보물과 식량을 가득 채워 돌아오기도 했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침몰했고 처절하게 참패하여 칼을 갈며 돌아오기도 했을거다. 3일의 기억을 5년 가까이 붙들고 붙들어서 연장시켜 준 드라마가 5년을 잘 버티고 이제 시즌 5를 막 끝냈다. 포스터 속의 배우들은 대견하게도 전부 살아 남았다. 베르겐에서 마주친 노르웨이 남성들은 유치원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이거나 유모차를 끌고 있는 평화로운 표정의 남성들이 많았다. 북유럽 복지 특집 다큐멘터리에 나올법한 그런 남자들말이다. 훤칠하고 우락부락한 선술집의 단골 말썽장이 같은 모습을 상상했던건지 그런 온화한 모습들은 사실 의외였다. 베르겐의 언덕 지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조깅을 하고 있는 여성들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검과 방패를 들고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약탈 나서는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이 오히려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평일 낮의 바깥에서 본 몇몇 사람들의 모습을 가지고 노르웨이 사람들, 나아가서 북유럽의 바이킹 후손들 전부를 특징 지을 수 없겠지만 어찌됐든 계속 떠올리며 연결지을수 밖에 없었다. 가톨릭 개종 훨씬 이전 리투아니아가 야만한 이교도의 나라라고 불리우던 때조차 이웃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빌니우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에도 언젠가 발트해 연안에 숨어들어 뿌리를 내린 바이킹들의 후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증이 필요했을 의상들과 세트 제작, 국적이 다른 배우들이 쏟아내는 각기 다른 영어 발음이나 특유의 액센트 같은 것들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 라그나와 아들들만해도 국적이 가지각색이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출신 배우들은 그런 느낌의 배우들만을 캐스팅했다손 치더라도 확실히 영미권 배우들과는 이미지 자체가 달라서 같은 백인이지만 그들 간의 차이를 비교하며 보는 것도 재미있다. 바이킹과 그들이 점령하려는 카톨릭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기본 토대를 이루지만 결국 바이킹 자신을 단합하게 하고 또 분열하게 하는 것은 노르웨이의 왕과 카테가트를 차지 하기 위한 이 형제들간의 싸움이다. 아버지 라그나의 강력한 통치력을 교과서 삼아 노르웨이를 통일하고 나아가 더 넓은 세상으로의 번영을 모두가 꿈꾼다. 어떤 아들이 좀 더 라그나에 가깝고 누가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아버지를 완전히 빼다박은 아들은 사실상 없지만 모두가 조금씩은 그를 닮았다. 타종교에 대한 관대함과 용맹함, 전술력, 선견지명등 그 아버지가 통치자로써 지녔던 모든 것을 그들은 전부 나눠가졌다. 전부 뭉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바이킹 족의 격언인가. 시즌 1에서 바로 죽어버리는 왕을 가브리엘 번 같은 알려진 배우로 기용한다던가 라그나의 막내 아들을 핸디캡을 지닌 핵심 인물로 설정하는 것 등이 왕좌의 게임 시즌 1에서 뜻밖에 죽어버리는 숀 빈이나 난장이 피터 딘클리지의 경우와 비슷해서 이 두 드라마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척박하고 춥고 거친 풍경들과 그런 조건들을 극복하며 살고 싸우고 하는 모습들도 제법 그럴듯하게 묘사된다. 그런 이유로 왕좌의 게임에서도 킹스랜딩이나 메렌, 브라보스 같은 온화한 기후를 지닌 화려한 풍경의 왕국보다는 무채색의 어둠과 눈보라가 지배하는 윈터펠이나 블랙캐슬 부분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언어와 민족, 시대 또한 다르지만 결국 같은 패턴과 같은 이치로 맞물려 있는 많은 이야기들, 지금이나 그때나 결국 사람 사는건 다 똑같구나, 저기 화면 끄트머리에서 물동이를 들고 볏짚을 짊어 지고 다니는 수많은 엑스트라들의 인생도 마냥 편하진 않았겠지만 권력을 지닌 인간들의 삶은 어쩌면 참 처절하고 피곤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종교를 논하지 않고선 성립될 수 없는 시대. 지금도 어쩌면 그 보이지 않는 권력에 휘둘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교황의 이틀 방문에 수십억을 쏟아 부어야하는 이 동네에서라면. 생각해보면 전염병이 난무하고 화재로 온 마을이 불타는 시대, 내 목숨이 주인의 손아귀에 달려있는 시대에 살았다면 정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신 밖에 없었겠다 싶다. 개종을 빌미로 한 침략과 단지 섬기는 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졌을 무자비한 살상, 심지어 뿌리가 같은 종교 속에서도 나뉘고 또 나뉘는 종파들 간의 배척과 반목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본성을 목도하게 된다. 드라마 속에서 바이킹들은 지금의 영국이나 프랑스등으로 진출하며 그들만의 종교와 신념을 수호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전략적으로 개종을 한다. 때로는 종교와 종족을 초월해서 끈끈한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심지어 형제 간에도 칼로 잔인하게 목을 가르고 나서 '전혀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그래, 내가 너였어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거야' 라는 식의 장면들이 많다. 거의 토너먼트처럼 약한 동족을 누르고 살아남은 강한 자들만이 노를 저어 정복에 나설 수 있었던 그들의 생리는 저건 잔뜩 미화된 드라마에 불과해 라고 무릎을 바늘로 찌르면서 봐도 약간 좀 멋있다. 바이킹들이 신처럼 섬기는 라그나의 동생으로 항상 이인자로 남다가 종국에는 프랑스로 항해해서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공주와 결혼해서 왕족이 되는 노르만족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의 허접한 불어를 순순하게 인정하는 저 분. 바이킹은 기후 변화로 빙하가 녹하서 항해 조건이 나빠져서 몰락했다고 하는데 드라마 곳곳에 토속신앙에 집착하고 원시적인 무기로 싸우는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에 대한 묘사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거의 새총과 비슷한 것들을 들고와서 전투에 동맹군으로 참여하는 핀란드의 사미족이 가장 좋은 예. 그리고 그들은 이 프랑스 삼촌이 끌고 오는 프랑스 군대의 선진 군사 기술과 전략에 무참히 짓밟힌다. 이것은 좀 더 비옥한 땅,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은 욕구에 목말랐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살인과 약탈이 묵인될 수 있는것일까.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너네가 먼저 할테니깐. 







반응형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Supersonic (2016)  (3) 2019.03.21
A coffee in Berlin (2012)  (1) 2019.03.20
Aloft (2014)  (2) 2019.03.18
The hunt (2012)  (0) 2019.02.26
Lost in Paris (2016)  (0) 2019.02.21
La melodie (2017)  (0) 2019.02.20
워킹데드 시즌 9를 기다리며 짧은 잡담  (0) 2018.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