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렌탈 패밀리>를 보았다. 지하철 안에 일본인들과 함께 앉아 있는 브랜든 프레이져가 시선을 끌었다. 필립(브랜든 프레이져)은 도쿄 생활 7년 차의 무명 배우이다. 간간이 오디션을 보고 광고를 찍고 단역 배우 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아직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듯한 이방인이다. 미국 배우가 일본에 와서 고독을 느낀다는 설정에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https://ashland.tistory.com/139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소피아 코폴라의 섬세한 드라마에서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도쿄로 온 빌 머레이가 정체된 결혼 생활과 커리어의 정점에서 공허를 느끼는 남자였다면 필립은 아직 하고 싶은 연기를 하지 못한 풋내기 연기자이고 여전히 혼자이다.
그는 매일 밤 발코니에 서서 맞은편 아파트에서 펼쳐지는 삶을 관조한다. 혼자서 집을 지키는 할아버지, 아이를 재우는 젊은 부부, 파티를 하는 젊은 연인들까지 그들을 마치 드라마를 보듯 지켜본다. 그가 닿을 수 없는 아파트 건너편에는 서로를 보듬는 소속감과 온기가 있다. 그리고 그가 공감할 수 있는 외로움도 있다. 필립은 저쪽에서 보는 이쪽에서의 그의 삶은 고독과 자유 중 어떤 것에 좀 더 맞닿아 있을지 상상할지도 모른다. <더 웨일> 속의 찰리(브랜드 프레이져)의 절망적인 삶을 이미 아는 우리는 필립의 삶이 그만큼 힘들지 않기를 바란다. 다행히 그는 일본 사회의 많은 부분들에 익숙해졌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감정을 느끼느라 정작 자신에 매몰되어 깊은 고독을 느낄 새는 없어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급하게 '우울한 미국인' 역할을 제안받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장례식장. 하지만 그곳엔 카메라도 '액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관속에 누워있던 남자는 갑자기 일어난다. 그것은 관에 누운 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존재의 의미를 느끼고 싶었던 어떤 일본인의 가짜 장례식이었다. 추도사를 읽는 사람도 사회자도 <렌털 패밀리>라는 서비스 업체의 직원들이다. 필립은 그렇게 그 서비스 업체에 고용된다.
'렌탈 패밀리'는 사람을 빌려준다. 동성연인과 해외로 떠나고 싶은 여성은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기획하고 필립은 그의 외국인 신랑이 된다. 어떤 싱글맘은 아이를 명문 학교에 입학시키기는데 필요한 남편을 의뢰한다. 필립은 그렇게 언젠가 자신이 남겨놓고 떠났던 딸의 인생에 나쁜 아빠가 되어 나타난다. 필립은 히키코모리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위로가 필요한 노배우를 찾아가 연출된 인터뷰를 한다.

필립은 그런대로 새로운 직업에 익숙해져 가지만 때로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다. 그 자신의 삶에서 진짜 아빠가 필요한 여자아이의 영원하지 못할 아빠가 된다는 것, 죽음을 앞둔 배우 앞에서 거짓 인터뷰어를 연기한다는 것에서 혼란을 느낀다. 의뢰인들은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고서라도 연출하고 싶은 인생의 한 순간을 위해서,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어떤 현실적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렌탈 패밀리를 찾아온다. 하지만 필립이 정말 ‘아빠’ 역할에 몰입하고, 아이가 그를 진짜 아버지처럼 바라보게 될 때, 기자가 자신의 아버지와 너무 친밀하게 일탈을 감행한다고 느낄 때 의뢰인들은 도리어 필립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진짜 감정이 개입되자 두려워진다. 그들의 선택이 결국 가족을 속이는 일이었다는 사실이 눈앞에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문학교 입학을 위해 딸에게 가짜 아버지를 붙여주는 일은, 선의일까 조작일까. 우울한 아버지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 가짜 인터뷰를 기획하는 일은, 자식의 효도인가 연출인가.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올리는 일은 배려인가 기만인가. 이들은 처음에는 분명 선의로 시작하지만 관계가 진짜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흔들린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가짜를 기획했지만 그 가짜가 조금씩 진짜가 되어가는 순간에는 겁에 질려 달아난다.
그 순간 필립은 점점 인물들에 몰입하고 자신이 그들을 도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오디션을 보았던 영화에 캐스팅이 되지만 소녀의 아빠가 돼주는 역에 몰입하여, 딸을 남겨둘 수 없어 출연을 포기한다. 가짜 인생을 위해 자신의 진짜 인생의 기회를 흘려보낸다. 그는 영화가 허구임을 아는 상태에서 화면 앞에 앉는 수만의 관객을 위해 연기하기보다는 모든 것이 진짜라고 감쪽같이 믿는 한 명의 관객을 위한 배우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필립과 수족관에 놀러 간 미아(섀넌 고먼)가 던지는 대사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이다. “아름답지만, 이건 가짜야." 아름답고 따뜻하고 감동적이지만 결국 가짜인것들, 그런것들이 오히려 가까운곳에 늘 존재한다. 우리는 자주 '아름답다'는 이유로 진실을 유보하고 상처를 피하기 위해 연출된 장면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는 충분히 따뜻하고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고 주변 사람도 그럭저럭 행복해지길 바란다. 진짜 아빠가 아니어도 아빠처럼 행동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충분하고 진짜 화해가 아니어도 화해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으면 괜찮고 진짜 사랑이 아니어도 사랑처럼 연출된 하루가 있으면 버틸 수 있다고. 혹시 우리는 행복하다고 믿기 위해 스스로 어떤 장치를 만들고 그 장치가 가짜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필립은 타인을 돕는 배우인 동시에, 타인의 삶을 빌려 자신의 결핍을 채운다. 외로움은 늘 우리를 타협하게 만들고 완전한 진실을 묵인하고서라도 잠정적인 위안을 선택하게 만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는 ‘아버지’가 되어본다. 가족이 없는 그는 가족의 일부가 된다. 그는 연기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그 장치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잠시 딸을 버렸던 나쁜 아빠의 정체성으로 딸을 마주해야 하더라도 부모로서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고 아버지의 따스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는 노배우에게서 아버지라는 어른을 느끼고 노배우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서 결말을 맺지 못한 자기 부모의 사랑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면서 브랜든 프레이져가 나왔던 <더 웨일> 생각을 많이 했다. 필립이 집안에 틀어박힌 히키 고모리 남자의 집에 가서 그와 게임도 하고 시간도 보내면서 결국 그를 집 바깥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다는것은 아마 그 청년 그 자신이 자기생을 바꿔보려는 의지로 그를 고용했기때문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더 웨일에서 챨리는 연인에게 실연당한 상처로 집안에 틀어박혀 자신을 완전히 방치하는 인물이다. 만약 그를 위해 누군가가 그를 도와줄만한 사람을 렌탈하거나 혹은 그 자신이 일말의 회생의 의지를 발견하고 자신을 도와줄 만한 누군가를 고용한다면 그것이 그 삶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신이 할 수 없는것을 누군가에게 대신 해줄 사람을 찾는다면 상담사나 간병인이든 신분을 가장하지 않은 사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 타인이 존재의 의지를 깨닫고 그가 행복할법한 지점을 연출하고 조작하는것은 정말 다른 자아를 기만하는것은 아닐까. 그가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를거라는 가정없이 가능한일일까. 거짓관계를 통해서라도 누군가가 평안에 이른다면 그것으로 가치있는일일까.
필립의 동료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가짜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 그 순간 사람들이 너를 평생 동안 기다린듯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 살아있음을 깨닫는 느낌을 버리기 힘들다고.' 나는 진짜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가짜와 타협한적은 없었을까. 행복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까. 혹은 그렇게 생각하라고 누구를 종용하지는 않았나. <렌탈 패밀리>는 분명 따뜻한 영화이지만 조금은 잔인한 질문을 남겼다. 거짓으로라도 연출하고 벗어나고 싶은 현실, 그 연출이 끝나고 원하던걸 가지고 나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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