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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파리, 13구 (2021)

 

 

 

 

오래전 파리여행 때 파리 5구에서 지냈었다. 자연사 박물관이 있었던 집에서 나와 작은 구멍가게 같았던 카르푸와 꽤 삼엄한 모스크와 바그다드 카페를 지나 아랍 인스티튜트가 나오던 길과 팡테옹과 소르본에서 뤽상부르 공원으로 이어지던 동선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지하철 5호선이 지나가는 생마르셀역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었지만 마침 공사 중이어서 버스를 타거나 두 정거장 떨어진 플라스 디탈리역을 꽤나 자주 이용했는데 아마 이 역이 환승역이어서 그랬을 거다. 버스를 타기 싫거나 조금 걷고 싶으면 보통 이 이탈리아 광장 쪽으로 걷곤 했다. 그렇게 걷다가 고층 건물들을 지나 어쩌다 미테랑 도서관을 발견했고 센강변에 다다랐다.

 

숫자로 구가 표시된 파리의 시티맵은 참 재밌는 지도였다. 지도를 보기 전까진 노트르담 성당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숫자가 커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파리의 구는 루브르 박물관 근처의 1에서 시작해서 20이 될 때까지 시계방향으로 돈다. 그러니 파리의 13구는 5구와 붙어있고 팡테온이란 마운드를 지나 5 구라는 내야를 지나면 13 구라는 외야에 도달하는 식이다. 

 

플라스 디탈리역에 내려서 거리를 걷다 보면 고층건물이 많았는데 그때는 약간 <파니 핑크>가 살던 베를린의 아파트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나에게 유럽 아파트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파니가 살던 아파트와 연결됐다. 관광지의 번잡함과는 또 다르게 역동적이었고 한국이나 리투아니아의 아파트촌보다는 덜 삭막했다. <파리 13구>로 나온 이 영화의 프랑스어 원작은 <Les Olympiades>이다. 올림픽 공원이 있는 송파구 같은 동네인 것 같다. <파리, 밤의 여행자 The Passenger of the Night> https://ashland.tistory.com/559074 에서 엘리자벳이 이혼 후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무는 고층 아파트는 15구에 위치해 있다. 역시 센강이 보이고 에펠탑도 보인다. 13구와는 정반대방향에 있지만 센강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것에서는 같다. 그곳은 오히려 개선문에서 라데팡스로 가는 곳과 좀 더 가깝다. 이 두 영화를 보면서 그 밤의 빛깔이 묘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은 물론 억지겠지만 그럼에도 지난 여행의 정반대 방향의 동선과 감상을 떠올리게 했다.

 

파리가 숫자로 도시의 구획을 정한 것은 대단한 발상 같다. 한편으론 잔인하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관광객들조차 구의 이름과 위치를 이해할 수  있고 프랑스 영화를 보면 저곳이 몇 구인지 정도는 아는 건물 하나를 중심으로 대충 때려 맞출 수 있는 것은 분명 좋다. 이것은 여행자는 물론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도시를 읽는 또 다른 언어처럼 느껴진다. 누구든 파리라는 도시에서는 공간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금천구라고 하면 난 서울 지도를 봐야 알 수 있지만 파리 13구라고 하면 어렴풋이 전해지는 그 느낌이 있다. 18구는 몽마르트르를 지나 아프리카계 프랑스인들이 가득했던 재래시장의 생드니로 연결된다. 생드니는 내게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파리 외곽을 대표하는 지역이다. 잘은 모르지만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 같은 영화가 찍어졌을 법한 지역이다. 험하고 거칠고 약간 파리가 숫자밖으로 애써 밀어낸듯한 이미지가 지배하는 곳이다. 

 

 에밀리(루시 장)는 치매에 걸려 요양소로 옮긴 할머니가 남긴 집에서 살며 중국 식당이나 콜센터 같은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용돈을 벌면서 살아간다. 게다가 남은 방 하나를 임대할 수 있으니 에밀리로썬 큰 행운이다. 아프리카계 프랑스인 카미유가 룸메이트로 들어오고 이들은 애매한 관계에 놓인다. 표면적으로 단순히 자유분방한 섹스파트너 같았지만 에밀리는 카미유를 좀 좋았했던 것도 같다. 카미유가 에밀리의 집을 떠나고 에밀리는 새로 방을 보러 온 중국계 룸메이트에게 자기 할머니를 간혹 방문해 주는 대가로 임대료를 좀 깎아주겠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일종의 가진 자의 권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적은 임대료를 낼 수 있는 중국계 프랑스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동의한다.

 

늦깎이 대학생 노라는 시골 보르도에서 올라와 집을 구하고 파리 생활을 시작한다. 벽의 타일이 뜯어져서 그것을 직접 손본다. 하지만 과파티에서 인기 많은 캠걸로 오인받은 이후로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보르도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서 부동산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박사과정의 카미유는 능력 있는 프랑스어 교사이기도 하지만 역시 돈이 필요하니 친구가 운영하는 부동산 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되고 카미유와 노라는 그렇게 만난다. 노라는 카미유와 사랑에 빠지는 듯 하지만 자기가 오인받은 캠걸인 앰버 스위트가 궁금해서 온라인상에서 말을 걸고 계속 현금 결제를 하면서 이 둘은 온라인에서 소통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이 둘이 실제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사랑에 빠지는 뉘앙스를 풍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미국 작가 Adrian Tomine의 그래픽 노블 Killing and Dying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셀린 시아마가 감독과 함께 각색에 참여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노라와 앰버의 미묘한 감정을 보여주며 여운을 남기는 것은 아마도 셀린 시아마의 각색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어 굿맨>에서 연달아서 노에미 메를랑이 맡았던 역할 때문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쉽게 사랑에 빠지고 상처입고 쉽게 헤어지는 파리의 청춘들의 삶을 집 구하기 쉽지 않고 임대료 비싼 파리라는 공간이 주는 무게로 인위적으로 짓누르지 않고 꽤 자유분방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이 젊은이들의 사랑과 방황의 중심에는 파리라는 유명한 도시 속 공간의 불안정함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관계는 틴더 매칭만큼 가볍게 시작되고 끝난다. 안정된 주거지를 가진 사람은 사랑을 선택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좀 더 자유로운 듯 묘사되지만 집주인이 세입자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해도 싫으면 떠날 수 있는 권리는 한편으론 세입자의 것이니 그도 그 나름의 입장에선 어디서든 원하는 곳에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도시의 건물, 거리와 광장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치열함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 13구의 올림피아드 지구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공간이며 도시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의 활기와 불안정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흑백촬영과 고층 아파트 단지의 모습으로 도시의 공간감이 강조되고 5구와 그 보다 더 안으로 들어가는 오래된 관광지들이 주는 고즈넉한 안정감과는 대비를 이룬다. 때로는 소통의 문제를 겪고 미련 없이 떠나고 새로 만난 사람과 또 집을 공유하고 해방되는 행위의 반복은 그들의 불안정한 청춘과 그럼에도 선택의 자유를 가졌기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할 수 있는 젊음의 특권도 보여준다. 에밀리와 카미유, 노라와 앰버가 겪는 관계의 변화는, 그들이 머무르는 공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파리를 좀 더 치열하면서도 낭만적인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영화의 포스터에는 노라가 아닌 에밀리가 중간에 있었으면 좋았을것 같다. 저 대만계 프랑스인 배우의 연기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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