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낯선>의 모든 장면장면이 보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스터피스를 꼽으라면 아마도 이 장면.
에바가 'I put a spell on you'의 제이 호킨스 버전을 틀어놓고 갓 도착한 뉴욕의 거리를 걷는 장면이다.
액정이 망가진 니콘 4500을 고집스럽게 삼각대위에 고정시키고 찍어서 가져온 비디오테이프 속 장면들은
그렇지 않아도 지독히 아날로그적인 이 영화를 내가 모르는 그 흑백의 시간속에 꽁꽁 묶어두지만
크라이테리언 콜렉션 디브이디에서 추출해 이어 붙인 이 연속된 장면들을 보고 있으니
마치 전설적 뮤지션의 리마스터링된 옛 명반을 들을때와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
시간이 생길때마다 이 영화의 모든 시퀀스를 이렇게 필름처럼 쭉 연결해봐야겠다.
화면속에서 결코 심하게 요동치지 않는 진열장 속 만화 피규어 같은 주인공들과
마치 필름속에 박음질된것처럼 아주 견고하게 씬에 바짝 달라 붙어있는 그들의 대사는 그 작업의 일등공신이 될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제 거의 집착에 가깝지만 희망을 구걸하지 않는 이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것보다 훨씬 적은 양의 영화를 보았고 음악을 들었지만
적어도 그 영화들과 음악속에서 나에게 절실한 장면과 가사들을 추억하며 내 생활에 구겨서 연결짓는것에 이미 익숙해진듯.
어쩌면 그것들이 날 현실에서 구제해줄지도 모른다는 판타지 같은것을 가지고 있는걸까.
그 멜로디와 가사, 대사와 장면들은 마치 거대한 열기구 속으로 뿜어지는 불덩이와 같은 내 생활의 연료일지도.
그렇게 텅빈 운동장에서 세네시간 날개를 손질하고 내가 깨금발을 들고 서있을 바구니 내부를 부지런히 빗자루질하고
연료를 꽉꽉 채워서 겨우겨우 하늘로 띄워버렸는데
정작 난 열기구 운전사와 서먹하게 단 둘이 남아 방향을 잃은 열기구 속에서 평온을 찾으려 안달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불행히도 나를 좌절케 하는 현실에서 내가 열망하는 또 다른 현실의 모습일지도.
그렇다면 내가 처해있는 현실이란것은 심히 절망스러운것일까.
아니면 이 우울은 그저 각자의 가슴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정립된 그 감정이란것을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과 언어로 경험하려는 어쩔 수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우리의 본능에서 빚어진것일까.
에단호크가 출연한 The Purge 란 영화가 있다고 하는데
모든 범죄가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12시간에 관한 영화라고 한다.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물건을 훔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련의 물리적인 범죄가 완전히 허용된다는 그 시간.
차라리 타인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솔직하게 내보여줄수 있는 그리고 12시간 후에는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다 잊을 수 있는 그런 마법의 시간이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감정 역시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누군가에겐 범죄가 될 수 있을까?
마구 뒤엉킨 뇌세포속을 겨우 겨우 빠져나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망가진 버스처럼 정차해있던
우리의 비밀스러운 생각과 감정들이 발가벗겨진 마네킹처럼 머리에서 입으로 입에서 귀로 다시 귀에서 머리로 전달될때.
우리는 우리가 내뱉은 감정의 희생양이 되어버릴까.
그 어떤 의무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그 12시간이라는 감정의 세계에서 우리는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가슴속에 지니고 있던 자신의 피스톨을 꺼내어
자신이 내뱉은 혹은 상대가 발설한 감정을 마치 없었던것처럼 파괴하려들까?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지켜야 할 감정은 무엇이고
그들이 파괴하려들 내 감정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런 증오도 미움도 계산도 없는 내 순수한 감정은
현실에서의 이해관계와 계산 불가능한 미래에 부딪혀
어두컴컴한 할렘의 으슥한 골목길에 자리한 싸구려 중국식당에서 흘러나온 음식쓰레기더미에 소리없이 묻혀버릴지도.
총격질이 난무하는 그 12시간의 지옥에서 내 감정은 내가 의도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불가능한 임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피스톨은 애초부터 장전될 수 없는 싸구려 고무로 만들어진 장난감에 불과했을지도.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아무런 무기도 없이 나 조차도 그 모험을 하기 쉽지 않을거란 생각에 다시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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