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제목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굉장히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운 좋게 뒷북을 친다. 서울의 풍경을 보여주는 영화가 좋다. 서울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떠나온 이후로 더 그랬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동네가 재개발로 가루가 되어버린 모습을 보고 나니 비슷한 풍경과 정취를 품고 있는 영화 속 어떤 동네들도 언젠가 사라져 버릴 운명일까 싶어 아쉬운 마음에 더 몰입하여 보게 된다. 무엇보다 찬실이가 힘차게 오르고 있는 저 햇살 가득한 오르막길의 끝과 그곳에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이 궁금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짝을 이뤄 일하던 영화 감독이 갑자기 죽어버리고 졸지에 백수가 된 프로듀서 찬실이. 찬실이는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고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찬실은 누가 뭐래도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원칙과 자부심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한편으론 꽤나 수동적이었음을 깨닫는다. 저 감독이 계속 영화를 만드는 한 별 탈 없이 옆에 붙어있기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항상 있을 거라는 자세가 없지 않아 있었기에 그런 생각의 기둥이 뽑혀 나가자 삶이 흔들린다. 영화는 갑자기 급해진 찬실이의 마음을 쫓아간다. 찬실이가 복이 정말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이다.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란 생각으로 전력질주 할 수 있는 대상을 가진 다는 것은 축복인지 모른다. 동네 담벼락에 방긋방긋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여전히 뭔가를 꿈꿀 수 있는 삶에 대한 순수한 자세를 가진 다는 것, 그 자세를 지니는 것에 방해받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공받는 것. 그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투쟁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는 복의 정의일거다. 찬실이도 찬실이의 주변 사람들도 그리고 우리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
오늘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며 단지 그것을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콩나물을 다듬고 한글을 공부하고 시를 쓰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삶에 대한 말랑한 자세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와닿았다. 발연기를 한다고 욕을 먹지만 여전히 불러주는 곳이 있고 여유시간에 프랑스어 수업이며 각종 취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여배우의 삶도 나쁘지 않다. 비록 영화를 만들 여건은 되지 않아 늘 시나리오만 쓰고 있다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 그럭저럭 살아가는 감독의 삶도 나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좋은 어떤 것에 조차 등급을 매겨 스스로 덜 좋은 상태에 놓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지만 아주 나쁘지 않으면 조금은 그냥 좋은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또래의 찬실이를 아주 오래전에 어딘가에서 만난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20여년전의 어떤 독립영화제에서 자원봉사자 표식을 걸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어떤 영화과 막내 학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명동 방면 출구 대신 옛 영화진흥공사를 향하는 휑한 출구를 뚜벅뚜벅 먼저 오르던 누군가, 선착순 200명에게 시사권을 나눠주는 영화잡지 시사회에서 내 앞의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해본 적도 눈짓을 주고받은 적도 없지만 단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던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사실상 너무나 달콤하고 배부르고 따스한 행위로 남았다. 그것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일종의 향유이고 사치이다. 그것을 업으러 삼고 이것이 아니면 안 되는 대상으로 여기며 그것과 함께 고뇌하고 좌절하며 성장하는 찬실의 삶을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찬실이 덕에 내가 볼 영화가 계속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찬실을 연기한 강말금 배우는 틸다 스윈튼과 유이, 히로스에 료코를 묘하게 섞어 놓은 느낌이 들었다. 사투리를 쓰지 않는 찬실이를 상상하는 것은 조금 힘들지만 러브레터 같은 멜로에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특이한 영화에도 잘 어울릴 것 같이 다채롭다.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찬실이의 집주인 아주머니는 '그것만이 내 세상'과 '미나리' 속의 나이 든 엄마들과 오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딸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산동네에서 혼자 사는 그녀가 사실은 곧 이민 간 딸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를 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콩나물을 다듬는 그녀의 얼굴에 냇가의 무성한 미나리 근처를 서성이는 할머니 얼굴이 겹쳐지는 것이다. 이 배우를 보면 자동적으로 헬렌 미렌이나 이자벨 위뻬르, 샤를롯 램플링 같은 시크하고 강단있는 비슷한 연배의 외국 배우들이 떠오른다. 아마 기억속에는 여전히 구르프를 말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사돈을 맞으러 나오던 사랑은 뭐길래의 양옥집의 세련되고 까칠한 사모님의 모습이 선명한데 심지어 그 드라마에 나왔던 젊은 배우들보다 더 왕성하게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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