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nius Chronicle2020. 10. 20. 16:54

 

 

Vilnius 2020

 

 

이 동네의 발코니는 보통 끽연을 위해 잠시 얼굴을 내밀거나 날이 좋으면 앉아서 볕을 쏘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수년간 이 건물을 지나다니며 하는 생각이란 것이 술을 잔뜩 마신 사람들이 발코니가 없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저 문을 무심코 열고 해장용으로 끓인 뜨거운 홍차와 함께 떨어지면 어쩌지 뭐 그런 종류이다. 평균 연식이 50년은 족히 되는 구시가의 집들 중에는 사실 저렇게 발코니를 뜯어낸 집이 많다. 보통 그런 경우 문을 열지 못하게 안쪽에서 못을 박아놓거나 문 앞에 작은 화분들을 여러 개 세워 놓거나 하는 식이지만 언젠가 한 여름 저 노란 문 한쪽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서 왠지 누가 문을 열고 떨어질 것 같은 상상에 혼자 덜컹한다. 언제나처럼 10월이 되었다. 예상보다 난방이 일찍 시작되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파고 시즌 4도 시작되었다.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던 Raise by wolves 시즌 1은 리들리 스콧이 손대지 않은 에피소드부터 심하게 흔들리더니 결국 병맛 드라마로 끝났다. 올해 자주 들었던 음악들의 리스트를 만들었고 브릿팝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요즘 카페 커피가 급 맛이 없어져서 잠시 거리두기를 했고 집에서 몇 종류의 케이크를 구워보며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이며 크리스마스에는 레드 벨벳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10월은 약간 그런 느낌이다. 학창 시절 돈이 필요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때. 지하철역까지 이어지는 거리에 알바 구함 같은 에이포 용지가 붙으면 가서 물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일이나 모레까지 붙어있으면 그때 물어봐야지 하며 쉬쉬할 때. 그다음 날 지나가는데 종이가 더 이상 붙어있지 않을 때 눈앞에서 날아간 알바 자리가 아쉬우면서도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내심 마음이 후련할 때의 그런 느낌. 겨울이 오는 것은 춥고 불편하지만 기어이 이미 10월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생각이 들면 크리스마스까지 두 달간 지속적인 어두워짐을 만끽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다. 겨울은 조금 불편할 뿐이다. 하지만 겉옷에 주머니가 생기니 이제 마스크를 잊을 일이 없게 각각의 코트에 각각의 마스크를 넣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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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영원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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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어이 10월에 발을 들여 놓은지 엇그제 같은데 오늘이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어제 조금 두터운 패딩을 (잠시 망설였으나) 꺼내 입으며 그래도 모자에 달린 털은 몇주간리라도 떼어야지.... 떼어내며 혼자 웃었답니다^^
    겨울에 들어서고 있어요.....
    그저 새로운 계절에 들어서며 그 계절에 맞는 건강 유의에 관한 당부(?) 안부 인사를 하던 시간이 그립네요. 너무 많은 것들을 그저 뭉뜨거려 ‘stay strong, stay safe’ 라 안부 인사 전하는 시절을 우린 함께하고 있습니다^^

    2020.10.31 17:2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래도 어쩐지 아직은 영상의 기온이라 좋으네요. 전 왠지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아무리 추워도 겨울이 이미 끝난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하지요.

      2020.11.27 05:51 신고 [ ADDR : EDIT/ DEL ]
  2. 뜨거운 홍차 잔을 쥔 채 발코니에서 추락하는 노란 셔츠 입은 남자(어째선지 노란 셔츠 입히고 싶음)에 대한 초단편을 써보고 싶은 글입니당

    2020.11.15 18:5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왠지 키크고 깡말라서 좀 작은 노란 반팔 티셔츠 입고 있을 것 같은 남자 생각남..이걸 쓰는 순간 스쳐지나간 인물은 노팅힐에서 휴그랜트 룸메이트로 나오는 남자..왜지..

      2020.11.27 05:52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