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mb (2021) - 아이슬란드 양(羊)영화 2

아기 예수 탄생 연극과 구유 (https://ashland.tistory.com/559059),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기사 한토막을 계기로 떠올려보는 아이슬란드의 두 번째 양영화. 첫 번째 양영화 (https://ashland.tistory.com/559014) 와는 결이 조금 다른듯하면서도 이제 나에게 양은 하나의 장르가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음식'에 관한 기사였는데 1위에 등극한 음식이 아이슬란드 양머리 음식 '스비드'였다. 아이슬란드의 기후와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신 붙들어 매고 양머리 정도는 먹을 수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해괴망측한 비주얼의 음식을 먹는 것에 묘하게 이입이 됐다. 하지만.
사실 양은 예쁜 동물은 아니다. 목초지를 가득 메운 양 떼를 보는 것은 귀엽고 양털실 로고는 언제 봐도 따뜻하지만 그냥 좀 동년배 동물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고 뭔가 그 뿔과 코와 수염 그런 모든 조합이 개인적으론 좀 불편하다. 동물에게까지 외모비하를 해서 미안하지만 '죄 없는 어린양'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게 많은 것을 선사하는 헌신적인 동물임에도 이상하게 정이 안 간다. 어쩌면 인류의 오랜 친구라는 이 양과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 속에서 생긴 미운 정 고운 정이 대대로 전해진 유전자에 남아있는 건가.
그런데 이런 양의 외모에 대한 개인적 편견에 이 영화가 쐐기를 박았다. 안 그래도 무서웠던 양이 더 무서워지기도 했고 한편으론 결국 나도 '다른' 외양을 가진 것들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어린양을 가엾게 여기고 행복을 좇는 인간의 이기심을 질책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인간의 몸과 양의 머리를 가진 이 생명체가 두려움을 유발했다. 진정 양이라는 존재와 스비드 요리가 아이슬란드에게도 이 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오래도록 혹독한 자연을 함께 버터 나가야 하는 존재였을 인간과 양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 양을 도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런 이유로 양에 대한 신앙이나 독특한 믿음도 생겨났을 것 같다.

아이슬란드 영화라서 역시 아이슬란드의 자연경관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아이슬란드 영화의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결국 그 배경. 설산과 너른 평원, 세찬 물살의 강이 어우러진 푸르스름한 잿빛 풍경을 카메라가 신비스럽게 따라간다. 그리고 그곳엔 당연히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은듯한 양목장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마리아와 잉그바르, 개와 고양이가 함께 살며 양도 키우고 농사도 짓는다. 망가진 농기계와 파종에 관한 습관적인 대화를 나누고 양의 출산을 돕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가 지나간다. 대화는 최소화되고 계속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들에 대해서 뭔가 짐작할만한 단서라면 여주인공 이름이 마리아라는 것 정도.
외국 영화에서 주인공이름이 마리아고 이것이 뭔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징으로 가득 차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 그냥 기독교에 관련된 이야기려니 하고 보기 시작하면 좀 편하다. 언어에 따라서 성서의 남성 이름들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마리아는 거의 대부분 그냥 마리아이니 다르게 해석될 여지도 별로 없다. 그리고 숫자가 의미심장하게 나오면 보통은 성경이다. <추격자>에서 김윤식이 '야, 4885 너지'라고 해도 우린 그것이 불교경전이나 사서삼경과 관련됐으리란 생각은 웬만해선 하지 않지만... 서양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에둘러 성경 얘기하는 것을 좀 좋아하는 것 같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작된다. 하지만 마리아의 눈빛에는 즐겁게 축제를 준비하는 따스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바깥에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알 수 없는 존재가 어두운 들판의 말들을 놀라게 하며 어디론가 향한다. 그가 향한 곳은 양의 우리, 낯선 존재를 보고 동물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다.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평소처럼 양의 출산을 돕다가 반인반수 그러니깐 반인반양의 아기양을 받는다. 양이 태어나면 보통 엄마양이 핥다가 젖을 물리지만 이 둘은 기형 양을 보고 놀라면서도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고 엄마양에게 핥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집안으로 데려간다. 3115 번호를 단 엄마 양은 그렇게 눈앞에서 자식을 빼앗긴다. 그 양은 크리스마스 저녁에 낯선 존재와 생겨난 어린양이다.
여기서 예레미아 31장 15절 다 같이 낭독하기.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통해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도다.'
히브리어에서 라헬은 암양을 뜻하고 성경에서는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통곡하는 야곱의 아내를 뜻한다. 한편으로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이상하게 생긴 양을 두려움에 폐기하는 대신 스스로 키울 생각을 한다. 문제는 엄마가 따로 있다는 것.
그러니 졸지에 자식을 잃은 엄마양은 슬픔에 계속 운다.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새끼양에게 '아다'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애지중지 키운다. 마치 이 굴러들어 온 행복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엄마양은 아다가 있는 창문 근처에 와서 계속 울고 마리아는 거슬리지만 꾹 참는다. 하루는 아다가 사라지고 마리아와 잉그바르가 온 사방을 뒤지는데 초원 한가운데 안개에 휩싸여 아다와 엄마양이 서있다. 마리아는 3115호 양에게서 아다를 매섭게 떼어놓고 안고 가는데 또 울어대는 엄마양을 향해 닥치라고 정색을 하는데 정말 무섭다. (누미 라파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확실히 북유럽 언어를 할 때 카리스마가 배가 되는 것 같다. 이 스웨덴 여성은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아이슬란드어를 다 한다고 한다. 모국어도 잘하겠죠 물론...) 그런데 그 말을 알아들고 뚝 그치는 엄마양의 표정이 더 무섭다. 그 모든 탄압과 모멸의 감정은 동물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기에. 어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이들 부부에게 재앙이 닥칠 것을 암시하는 표정이다.

잉그바르는 창고에서 아기 침대를 꺼내온다. 이들에겐 어려서 죽은 '아다'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그러니 이들은 머리를 제외하고 사람으로 태어난 아기양을 아마 신이 다시 한번 점지해 준 것이라 생각했을 거다. 우리가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우린 충분히 다시 한번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이 영화는 한편으론 자식을 잃은 두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생명의 부재와 상실감으로 점점 대화도 없고 황폐해져 가는 삶 속에 양우리에 나타난 아기양을 통해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부부는 하지만 다른 이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다. 아마도 그 대상이 말 못 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더 수월했다. 게다가 한번 아이를 잃어 본 마리아는 불안하다. 그 자신이 아기양을 잃은 엄마양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걸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니 더 혼란스럽지만 무시할 수밖에 없다.
아다는 풀을 주면 풀을 뜯어먹을 수 있는 양이고 벽에 붙은 양 떼 사진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마치 몇 번의 윤회를 거쳤어도 자신은 늘 양이었다는 듯이. 마리아는 아다를 소유할 것이 아니라 다른 양을 키우듯 어미양의 보살핌 속에서 아다를 함께 키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다가 정말 성령이 만들어낸 존재라면 그것은 누구 하나의 소유물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마리아가 책 읽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재밌게도 <개의 심장>을 읽는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마리아의 내적 갈등이 어미양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담담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마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갈등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음에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어떤 일을 모른 척 강행할 때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자신을 외면하는 감정이 담긴 표정이다. 마리아는 아마도 아다를 결국 친엄마의 품에 돌려줘서 양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결핍을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아다의 존재를 포기하지 못한다.
마리아는 결국 자식을 잃고 집 근처를 서성거리며 계속 울어대는 어미양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총으로 쏴서 죽인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 인양 지키려는 욕심은 그녀를 두려움 없는 존재로 만든다. 영화에서 마초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잉그바르의 동생 페튀르가 등장하는데 초반에 아다의 존재에 의심을 품고 이 부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점차적으로 부부에 동화되며 아다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리아와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잉그바르는 늘 우유부단한 남편으로 묘사된다. 목수 요셉처럼 나무를 다루고 마리아만큼 공격적이진 않지만 아다의 존재를 성스럽게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모성본능과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으로 어쩌면 아다를 대하지만 아다에 대한 요셉의 시선은 그보다는 좀 더 성스럽다.
한편으로 이들의 죽은 딸 아다는 마리아와 페튀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니었을까도 생각한다. 마리아는 잉그바르가 모르는 그런 자식을 얻었고 결국 그 대가로 딸을 잃지만 다시 되돌려 받은 아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어미양을 죽인 사실을 알고 있는 페튀르의 협박과 유혹을 뿌리치고 페튀르를 차를 태워 보낸다. 하지만 그녀가 집을 비운사이 잉그바르와 아다는 집을 나선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몸과 양의머리를 가진 무섭지만 한편으론 영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존재를 만난다. 마리아가 어미양을 죽인 그 사냥총으로 그는 잉그바르를 쏘고 아다를 데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아다도 잉그바르도 없는 초원에 홀로 남은 마리아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양인간에 대한 묘사는 사실 너무 노골적으로 나와서 신비스럽게 진행되는 영화 분위기를 해칠 정도인데 사실 그게 없이 이 영화를 진행할 방법은 결국 없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다시 엄마이고 싶고 빼앗아 온 자식을 지키려는 애매한 모성을 합리화하는 누미 라파스의 표정과 아다의 손을 잡고 떠나는 영적인 존재가 오묘하게 중첩된다. 마리아 그 자신이 신의 자식을 잉태한 어미양을 죽였지만 요셉이 사라진 그 현장에서 마리아가 동정녀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마리아가 다시 아다를 만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