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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니우스의 테이글라흐 구시가의 필리모 거리의 유태인 회관 건물에 겸한 베이글 카페. 직장에서 가까워서 오래전에 자주 가던 곳인데 뜸해졌다 요새 간혹 다시 간다. 예전부터 필리모 거리에 있는 폴리클리닉에서 아침 일찍 굶은 채로 피검사를 하고 나면 하나의 의식처럼 배를 채우러 가던 곳이 두 군데 있는데 그중 하나이다. 우선 병원에서 가장 가깝고, 딱히 맛있지는 않은 커피와 디저트가 있고 가정식에 가까운 음식을 파는 곳들. 이곳은 베이글 샌드위치나 샥슈카 같은 간단한 음식만 팔았었는데 오랜만에 가보니 뒷공간을 완전히 터서 꽤 전문적인 유대 음식점이 되어있었다. 이들의 간혹 얄미울 정도로 합리적이며 얄미움을 느꼈다는 것에 나름의 자책을 하게 만드는 알고 보면 딱히 잘못한 것 없이 그저 철두철미 한 것일 뿐인 그런 자기 확신에 찬 본..
과학의 날의 파블로바 몇 년 간 친구의 생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여 매번 그 주변의 날들에서 서성이며 두리뭉실 축하하다가 작년인가는 간신히 기억해 낸 그 날짜가 어딘가 익숙하여 생각해 보니 4월 21일 과학의 날이었다. 산속에 위치한 중고등학교를 다닌 관계로 과학의 날이 되면 우리들은 대학 캠퍼스의 모나지 않은 널찍한 바위들을 하나씩 전세내고 앉아 과학 상상화를 그리던가 과학 글짓기를 하던가 날아다니는 벚꽃을 잡으러 다니던가 그랬다. 이제 30세가 된 리투아니아 친구는 자신의 생일이 한국의 과학의 날로 인해 잊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고 나는 내가 리투아니아에 처음 왔을 때 그가 고작 13살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신기했다. 하지만 같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식의 어른스러운 말을 적용하기엔 우리가 영원히 철이 들..
부활절 지나고 먹은 파스타 회상 부활절을 보내고 일정상 혼자 하루 먼저 일찍 돌아와서 아무것도 없는 냉장고를 뒤져서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며 영화 컨트롤을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컨트롤은 조이 디비전의 프론트 맨이었던 이안 커티스에 관한 영화인데 결정적으로 흑백필름이고 음악이 많이 나오고 음악을 했던 사람이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명명백백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비록 실재했던 그 영화 속의 삶은 암울하기 짝이 없지만. 무슨 계기로 이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진 건진 한 달이 지나니 그 경과가 또렷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 더 웨일에서 사만다 모튼의 피폐한 연기를 보고 이 영화가 생각난 것도 같고 지난달 한창 듣던 본즈 앤 올의 영화 음악 때문에 그랬던 것도 같다.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 가장 쉬운 경로는 나..
부활절 회상 4월의 중턱에 있었던 부활절 회상. 부활절 아침 식탁에 둘러앉아 달걀을 잡고 서로의 달걀을 깨뜨리는 게임에서 깨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그 달걀들은 점심쯤 지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 달걀들은 이제 광활한 대지를 굴러야 한다. 얕은 언덕에 저런 나무 막대기를 적당한 경사로 세워놓고 그 위에서 달걀을 굴려 남의 달걀을 건드리면 가져가는 게임이다. 부활절이 지나고 직장에서든 지인이든 만나면 서로 염색한 달걀을 교환하기도 하는데 그때 참 난처한 감정이 있다. 내가 계획해서 작정하고 만든 갓 삶은 반숙은 고소하고 맛있지만 금방 삶은 달걀이 아닌 며칠 지나서 교환한 타인의 달걀을 까보니 반숙인 경우 그 순간엔 달걀과도 데면데면해질 수 있구나 깨닫는다. 아주 오래전에는 저 언덕에 동네 아이들이 다 나와서 달걀을..
도서관에서 차 한 잔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장갑은 확실히 안 껴도 되고 5개월을 주야장천 입었던 제일 따뜻한 패딩도 이제는 드디어 세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계속 비가 오고 있는 걸로 봐선 내일부터는 분명 또 기온이 내려갈 것이다. 오늘의 라디에이터는 여전히 따뜻하고 서머타임도 시작되어 어제의 22시는 오늘의 23시가 되었다. 며칠 후면 내가 빌니우스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주간이다. 그때 게디미나스 언덕에는 찢은 론리플래닛을 꽂을 수 있을 정도로 녹지 않고 얼음 결정이 되어가는 단단한 눈들이 가득했었고 어떤 날은 비가 하루 종일 내려서 호스텔 접수창구(?) 아주머니에게 우산을 빌려서 돌아다녔었다. 17년 전보단 확실히 따뜻해졌지만 날씨의 패턴은 여전히 비슷하다. 대부분의 카페들이 바깥으로 테이블을 내다 놓기 ..
친구의 새싹들 친구 한 명이 새싹 장사를 시작했다며 새싹을 넘겨주고 갔다. 완두콩 왕자(완두콩 위의 공주의 패러디일텐데 완두콩이 남성명사라 그럴듯하다) 라는 이름의 새싹부터 브로콜리 형제( 브로콜리 Brokolis 와 형제 Brolis 의 어감때문이다)라는 브로콜리 새싹과 세 종류의 무순등등 여러 아이들을 이것저것 섞어 주었다. 다음에 씨를 뿌리거나 물을 주러 갈때 같이 가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숲에 온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이런 아이들은 그 자체를 먹기보단 아직까진 장식용으로만 쓰이는 경우가 많아서 고민이 많다고 했다. 삼사십대때의 우리엄마는 늘 쌈만 싸서 드셨는데 가끔 문득 드는 생각이 과연 그것이 채식 취향이었을까 싶다. 어쩌면 간편하면서도 배부르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부시아테로 만든 할머니 파스타, 세상에 참 다양한 모양의 파스타가 있는데 그 파스타 종류 이름만 다 알아도 이탈리아 단어 500개 정도는 그냥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뭐 무슨 모양이든 만들어서 이름 붙이면 그게 곧 그냥 파스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신발 주걱 모양 파스타도 빨래집게 모양 파스타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누가 만들고 있을 것만 같다. 가끔 파스타 만드는 영상을 찾아보는데 요리 메뉴로서의 파스타 말고 그냥 요리사든 할머니든 누구든 밀가루 반죽해서 밀고 굴리고 누르고 굳이 구부리고 집고 자르고 해서 여러 가지 형태의 파스타 면을 만드는 영상들이다. 이 뻥튀기 같은 파스타의 이름은 Busiate 란다. 길게 자른 파스타를 대바늘 같은 꼬챙이 위에 놓고 굴리고 감아서 쭉 빼면 저렇게 되는데 시칠리아의 트라파니라는 지역..
스탠리 투치의 책 동네 마트 2층의 서점에 잠시 갔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장 두 페이지 정도만 읽고 나왔는데 재밌다. 배우 스탠리 투치가 쓴 음식 에세이였는데 중간중간 이탈리아 집밥 레시피도 보였다. 다음날 도서관에 간 김에 대출하려 했지만 대출 예약만 하고 왔다. 5번째 대출 예약자라고 했다. 제목은 '맛, 내 인생의 음식 Skonis, Maistas mano gyvenime. 정도가 되겠다. 스탠리 투치는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 빅나이트의 배우이자 감독이기 때문에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책의 제목이 완전히 수긍이 갔고 책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은 후에야 스탠리 투치가 레시피 북도 출간했고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병을 앓고 음식 섭취가 얼마간 불가능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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