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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stage

94년의 여름_마로니에_칵테일사랑




마로니에의 이 앨범은 내가 생애 최초로 구입한 LP였다.  라디오를 열렬히 듣던 시절에 가요였으니깐 아마 FM 데이트나 별밤 같은 프로그램에서였을거다.  칵테일 사랑을 처음 듣고 완전 반해서 공테잎에 녹음을 해놓고 들었는데 정말 나만 좋아하고 싶은 그런 보석같은 노래였다.  이 앨범속의 <내게로>란 곡도 참 좋아했다.  그런데 공테잎을 재생할 필요도 없이 라디오에서는 거의 매일 이 노래를 틀어줬고 그렇게 엄청난 선곡율을 보이던 이 곡은 결국 공중파로 넘어가서 가요톱텐 골든컵까지 탔다.  그때 난 약간의 상실감을 느꼈다.  알다시피 이 노래는 정말 요즘 세상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기상천외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이 노래를 듣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릴지도 모르는 그 모습들,  선글라스를 끼고 기타치는 남자와 양쪽에 새초롬하게 서서 예쁘게 몸을 움직이는 언니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부른 노래에 입만 뻥긋뻥긋하면서 춤만 췄었다는 사실이 부른이들의 소송으로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으니.  그럼에도 라디오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유행하기 시작한 곡이 브라운관이라는 파급력을 가지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것은 작곡가가 급조한 이 립싱크팀의 비주얼이나 케미가 책상앞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이 서정적이고 상큼한 음악에 가졌던 우리들의 판타지와 어느 정도는 상응했다는 소리인것도 같다.  그런데 이 노래가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요즈음 한국의 혹서때문이었다.  2006년을 마지막으로 난 한국의 여름을 경험하지 못했다.  빌니우스의 현재 날씨는 한국의 가족들에게 미안할정도로 청량하고 시원하다.  사람들은 오히려 여름이 온것같지도 않았는데 끝났다고 푸념한다.  이곳이 조금 더워져도 좋으니 한국이 조금이라도 시원해졌으면 좋겠다.  1994년의 여름은 내 생애 가장 더웠던 여름이었다.  그외의 여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음반을 1994년에 샀다.  그때 들었던 일련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때 보았던 영화들, 영화를 보러 가던 길에 거리에서 울려펴지던 그 음악들이 차례대로 떠오른다.  그 해 을지로 3가에 명보플라자가 개관했다.  개봉작 트루 라이즈를 보기 위해 그 더위속에 정말 엄청나게 긴 줄에 서서 두시간이나 넘게 기다린후에야 그 영화를 봤다.  신사동까지 키아누리브스의 스피드를 보기위해 친척언니와 타고갔던 지하철 3호선의 열기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코아 아트홀에서 본 트란안홍의 그린 파파야 향기와 예전에 피아노 거리라고 불렸었던 그 광장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들.  이 영화와 영화 포스터는 그 해의 습하고 끈적했던 여름의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려서 그 영화를 본 날은 1994년의 대표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아 그 여자 주인공 꼬마보다 훨씬 안 예쁘고 짜증나지 않니' 얘기하면서 친구와 코묻은 돈을 내고 먹은 장터국수의 비빔냉면과 그래도 배가 차지 않아서 편의점에서 데미소다 레몬 맛을 사서 동네 떡볶이까지 헤치우고 집에와서 들이키던 얼음을 넣은 미숫가루.  모든것이 그 타들어가던 열기에 관련된 기억이다.  딱 이 뿐이다.  내년의 한국의 여름이 올해만큼 덥지 않다면 누군가에게 올해는 나의 1994년처럼 남을것이다. 난 응답한다 시리즈를 보지는 못했다.  보고나면 왠지 우울해질것도 같고 내가 잊고 있던 더 많은 추억을 타인이라는 필터를 통해 기억하게되는것이 어색하기도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또렷히 기억하고 있는 어떤 사실들만 계속 남겨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 기억들은 더 진해질뿐 흐려지지는 않는다.  살아남은 것들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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