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작년에 오랜만에 한국에 갔을때 아는이들의 집을 방문할때 마다 책 한두권씩을 빌려오곤 했다.
빌려온 정성이있으니 끝까지 읽을것 같았고 돌려줘야하니 그 핑계로 한번 더 만나겠구나 싶어서.
그때 읽은 몇권의 책 중에 김영하의 '퀴즈 쇼'라는 소설이 있었다.
작가 스스로 얘기한것처럼 한창 피씨통신이 유행하던 90년대 후반을 살아 간 작가 또래 세대를 위한 소설이었다.
나는 386세대도 아니고 작가의 또래도 아니지만 나도 분명 그 시대를 살았고 소설의 내용도 무척이나 공감이 됐다.
유니텔이나 천리안같은 피씨통신이 유행하고 번개니 정모 정팅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나의 청소년기는
386세대가 공유하고 공감하려했던 것들을 동경하며 마음속에서나마 어른이 되기를 희망했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영화 <접속>을 다시 보고서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과는 분명 세대가 다른데 영화가 찍어지고 상영되던 그 시대의 정서는 너무나 공감이 되는것이다.
과연 나는 그 당시 그 영화를 볼때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어떤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세월이 흘러도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주인공들과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그들의 나이와 얼추 비슷해진 지금 내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주인공들의 눈높이로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이 느끼던 감정과 비슷한 것일까.
그렇다면 역으로 나보다 나이든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미래에 내가 느낄 가능성이 있는 감정들을 예측이나마 해볼 수 있는 걸까.
그 당시 피씨통신상에서도 굉장히 유명했던 소설이 바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당시로써는 흔하지 않은 세로로 된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 책을 나도 샀었고 읽었고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등장하는 그림 제목이나 화가들이름을 보면서 막연히 와 멋있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했던 그런 소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벌써 이미 영화를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것 같고
피씨통신 영화 동호회에서 은근히 지지하는 분위기도 있었고
이런저런 정황상 독립영화 필 충만한 그런 영화가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 영화를 얼마전에여 우연히 보았다.
제작년도가 2003년도다. 피씨통신하면서 처음 알게된게 97년인걸 생각하면 차이가 꽤 있다.
제작에 차질을 빚었던거거나 아니면 내 기억 전부가 잘못된것이거나 그렇겠지.
생각지도 않은 영화를 보게되니 소설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읽고나면 마치 처음 읽는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겠지.
그럼에도 몇몇 장면들은 소설에서 읽었던 부분들과 너무 선명하게 겹쳐져서 놀랐다.
행위 예술가인 추상미와 사진 작가인 장현성이 조우하는 장면같은것.
아마도 추상미라는 배우가 가진 색깔이 너무 뚜렷하고 독보적이기때문이겠지.
탄생과 죽음은 신의 영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을 신이라고 일컫을 수 있는걸까.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감하려는 욕구와
하루하루를 마치 죽음이 영원히 건드릴것 같지 않은 영역으로 간주하며 사는 삶의 욕구 사이.
사람들이 지켜보는 예술행위 가운데서 서서히 죽어가는 주인공과
다시 살고싶어졌어요 라고 말하는 찰나 불의의 사고로 죽는 또 다른 등장인물.
어찌보면 죽음에 관한 세상의 모든 담론만큼 우스운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간혹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누군가의 인생에 끼칠 영향따위등을 상상한다.
그 순간 사람들은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상처따위를 보상받는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파괴로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얻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보면 모든게 다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마치 레드드래곤처럼.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기망상.
자살이란
어쩌면 모두에게 똑같이 지루하고 고독하고 갑갑한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유로 끝내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처절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낀다면
그 고통이 그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고통이기 때문이지,
결코 그 고통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려는 시도도 내 고통의 정도와 당위를 설명하려는 노력도 부질없는것은 아닐까.
자살한 사람들에게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것이었다고 말하는것은 소용없다.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미 자신의 삶을 평가절하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니깐.
-왜 살아있지도 않은 꽃에 그렇게 정성들려 물을 주나요?
-살아있든 살아있지 않든 그것이 왜 중요한가요.
죽은후에도 죽었는지 알 수 없고 죽은 후에는 살아있었던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 수 없는것.
과연 나의 오늘이 저 조화와 다른게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그래 어쩌면 죽음에 관한 담론만큼 무의미하고 매력적인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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