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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huania

핑크수프의 계절, 리투아니아의 여름.

 

차가운 비트 수프, 샬티바르쉬치아이 (Šaltibarščiai)

 
 
세탁한 겨울 코트를 다시 꺼내 입어야 하나 고민했던 추운 5월이 지나갔다. 바깥 기온이 낮으면 옷을 두껍게 입으면 그만이지만 난방이 끝난 상태에서 실내온도가 계속 떨어지면 별 방법이 없다. 그런 시기엔 집을 나서기 전 옷을 다 챙겨 입고 잠시 집안에 있을 때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어쩌면 리투아니아에서 봄코트는 봄에 '집에서' 입는 코트라는 의미였는지도.

그래도 4월의 어느 일주일은 제법 봄 같았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벚꽃과 자두꽃, 개나리가 아주 짧은 시간동안 피고 졌다. 뒤이어 라일락이 폈고 조팝나무, 밤나무가 차례로 꽃을 피운다. 그리고 밤나무는 이제 초록이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봄과 가을은 아주 짧다. 봄이 과연 오긴 하는걸까 생각하다 보면 보통 6월이 된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에서는 또 6월 1일을 여름의 시작으로 본다. 6월 전후로 드라마틱하게 날씨가 좋아진다. 여름에도 들쑥날쑥 추운 날과 더운 날이 반복되겠지만 습도도 함께 오르기 때문에 이젠 정말 봄코트도 세탁할 수 있을 것 같다. 
 

핑크 수프 페스티벌

 

몇년전 우크라이나가 보르쉬를 유네스코 긴급보호 필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에 자극을 받은 걸까. 빌니우스에서는 3년 전부터 6월 초, 여름의 시작과 동시에 핑크수프 페스티벌이 열린다.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우리도 다 허구헌날 먹는 음식인데 '긴급 보호' 씩이라니 좀 웃기다', '이건 너무 정치적이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사실 우크라이나 보르쉬에 비해서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집에서 끓이는 보르쉬는 단순한 재료때문에도 그렇지만 약식으로 끓이는 느낌이긴 하다. 
 

핑크수프에 헌정된 리투아니아의 일러스트레이터 Eglė žvirblytė 작품 (구글)


 
어쨌든 리투아니아는 핑크 수프 벽화를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급기야 페스티벌까지 열면서 이제 돌아올 수 없는 핑크수프의 강을 건넜다. 핑크 수프의 나라로 거듭나기 위한 이 나라의 전방위적인 노력을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것 같다.  뜨거운 보르쉬는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밀렸지만 차가운 보르쉬만큼은 우리가 정말 사수해야겠다는 문화유산이라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것이 너무 귀엽다. 아마 언젠가 대성당 광장에 세상에서 가장 큰 핑크수프 냄비가 등장하고 성 패트릭 데이에 초록색으로 강을 물들이는 아일랜드처럼 빌니우스를 흐르는 작은 강 빌넬레가 분홍으로 물드는 날이 오지 않을까. 가까운 시일 내에 핑크수프 수호성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빌니우스의 TV타워

 
 
구시가에서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동네는 독립 즈음해서 TV타워를 점령하려고 돌진하는 러시아 장갑차를 저지하려던 수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던 안타까운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매번 중요한 날마다 TV타워에서 펄럭이는 리투아니아 국기는 리투아니아인의 애국심 고취에 일조를 하는데 페스티벌의 시작 전부터 핑크수프깃발이 휘날린다.

사실 리투아니아인들의 습성을 감안하면 이들은 기꺼이 국기도 저렇게 바꿀수 있는 사람들이다. '왜 안돼?'의 정서가 강하고 소수의 의견도 쉽게 묵살되지 않으며 작은 의견에는 그에 걸맞는 작은 추진력들이 또 조용하게 뒤따른다. 오랜 기간 여러 민족들이 함께 모여 살았고 그 누구도 당당히 주류라고 말하기 힘든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은 특히나 소수였다. 누구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도 의견도 존중받기 어렵다.

중국 대사관 앞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티베트깃발을 들고 시위를 하는 작은 움직임에도 도시 어딘가에 티베트 동산이 조성될 여지가 생긴다. (물론 그런 티베트 공원은 시골 노인정 앞마당처럼 작고도 아늑하다) 도시 한가운데 뜬금없이 공화국을 세운다거나 자국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의 동상을 여기저기 세우고 한번 뭔가에 꽂히면 경제적 이익이나 손해에 대한 철저한 계산 없이 어떤 일은 진행된다. 이들은 누군가가 뭔가를 생각해 내고 실행한다는 그 자체를 높게 평가하고 함께 고무된다. 그것은 확실히 따뜻한 나라 사람들이 가진 삶에 대한 화끈한 정열과는 좀 다르다. 춥고 음울한 날씨 속에서 발휘되는 그들만의 열정이 분명히 있다.  

구청사 광장의 수프깃발.




폴란드가 온 사방을 삐에로기 이미지로 성실하게 채우는 것처럼, 우크라이나가 평화 시위 행사에 국밥을 퍼주듯 뜨끈한 우크라이나 보르쉬를 나눔 하는 것처럼 그렇게 리투아니아는 핑크수프 깃발을 걸었다. 부분적이긴 했지만 한때 하나의 나라였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가 우여곡절의 역사 끝에 여전히 지상에 남아 당당히 자기 것을 주장할 수 있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론 큰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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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의 너른 언덕을 차지한 핑크수프 바디 슬라이드.

 
 
핑크수프는 스페인의 가스파쵸, 우리나라의 오이 냉국처럼 여름에 먹는 콜드 수프인데 제조방법이 정말로 간단하다. 장담하건대 리투아니아에서 이 핑크수프를 먹기 위해 식초로 간을 맞추거나 생비트를 사서 끓이기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리투아니아 마트에서는 얇게 채쳐서 절임 된 비트들과 핑크수프용 케피르나 버터밀크를 간편하게 살 수 있다. 
 
리투아니아에 오래 살다보니 체펠리나이처럼 느끼한 음식을 몸이 원하는 순간이 있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물컹한 절인 청어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날이 더워지면 핑크 수프가 절로 생각난다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처럼 내 몸이 핑크 수프를 절절하게 원하는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훨씬 덥고 습한 한국 여름에 대한 기억이 아직 몸속 곳곳에 남아있는 걸까. 시원한 냉면이 당기고 얼음을 띄운 미숫가루와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팥빙수에 본능적으로 손이 갔던 한국의 여름에 비해 아마 리투아니아의 여름은 몸에 뭔가를 주입해서 시원해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엔 나에겐 여전히 너무 선선한가 보다.
 
셰프의 방문을 열어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고 자기 몸이 면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면서 라멘을 끓여달라고 애타게 호소하던 <남극의 셰프>의 대원처럼 내 몸 구석구석 핑크수프가 흐르는 강렬한 느낌은 여전히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어떤 계절적인 의무감에 이끌려, 사실 아주 간편하게 한 끼를 때우기 위한 꼼수로 핑크수프를 제조한다. 


 
 

핑크수프의 리투아니아어는 샬티바르쉬치아이 Šaltibarščiai이다. 단어 그대로 차가운 보르쉬라는 뜻.  핑크 수프 레시피도 천차만별이지만 케피르와 절인 비트를 섞는 것이 기본이다. 케피르 대신 버터밀크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좀 더 걸쭉하고 진하게 먹고 싶을 때는 사워크림을 추가하기도 한다. 보통 1리터짜리 케피르에 500그램 정도 되는 절인 비트를 넣는데 건더기를 많이 먹고 싶다면 비트나 야채들을 더 넣으면 된다. 
 
 
 

비트와 케피르 섞기

 
 
차가운 비트 수프는 단순히 뜨거운 여름에 먹는 차가운 수프라기보다는 한여름, 재배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대표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겨울이 긴 리투아니아의 척박한 영토에서 잘 자라는 감자와 비트 같은 뿌리채소들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파낸 비트를 대량으로 끓인 후 채를 쳐서 싱싱한 허브와 식초를 넣고 빈 병에 차곡차곡 채우는 것은 이들의 여름 일상이다. 우리가 김장철에 김치 속을 전부 채우기 전에 일부 절인 배추를 당일 점심거리로 남겨놓는 것처럼 이들도 절인 비트 일부를 남겨둔다. 남은 비트에 싱싱한 오이, 쪽파, 딜과 함께 케피르와 섞어서 먹는 것은 아마 김장이라는 일 년 지대사 후에 먹는 김치 보쌈과 비슷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차가운 비트수프에 곁들일 감자도 살짝 끓인 후 오븐에 그냥 집어넣는다. 프라이팬에 튀기면 더 맛있겠지만 오븐이 편하다.
 
 

 
 
절인 비트를 그릇에 담고 케피르를 붓는다. 젓다보면 어느 정도의 농도인지 어떤 맛인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한다. 색감도 드러난다. 마치 하얀 페인트에 분홍 염료를 붓고 섞는 기분이지만 이 음식은 그저 비트 본연의 색감으로 충만하다.
 
 

 
 
이것은 마치 해변에 서있는 수백 채의 방갈로를 핑크색으로 칠하라는 명령을 받고 뚜껑이 열린 <베티블루>의 베아트리스 달이 집주인의 승용차에 광적으로 들이붓던 핑크 페인트 색감에 가깝다. 80년대의 장 자크 베넥스가 핑크수프를 알았더라면 베아트리스 달이 페인트를 입에 붓는 신을 집어넣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이런 색감은 비트가 덜 들어간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식 느낌이다. 이럴 땐 비트가 좀 더 필요하다. 작년에 친구가 가져다준 홈메이드 비트를 열어서 붓는다.
 

 
 
그래도 색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진공 포장해서 파는 끓인 비트까지 추가로 그레이터로 채 썰어 넣는다. 리투아니아에서 이 정도 굵기의 그레이터는 Burokinė, 보통 비트용 그레이터라고도 부른다.


딜, 쪽파, 오이, 삶은 달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보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할지 모르는데 보통 저 재료들을 전부 다 집어넣고 섞는 것이 국률이다. 하지만 난 각자 넣고 싶은 만큼 넣으라고 전부 섞지는 않는다.  


 
 
적당히 구워진 감자에 리투아니아의 쏘울허브 딜도 뿌린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산만하고 폭주하던 핑크 수프 페스티벌을 뒤로하고 유유히 집에 돌아와서 만들어 먹는 핑크 수프. 이제 곧 끝날 짧은 여름의 시작을 축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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