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lm

<Enemy> Denis Villeneuve (2013)






이 장면을 흑백처리하면 정말 딱 70년대 B급 호러의 한 장면같다. 물론 다소 시대를 앞서간. 왜 디브이디에 수록된 메이킹 필름을 보면 빌딩 미니어쳐 위에서 실 달린 거미를 인형극처럼 조종하는 감독이 나올법한. 필요 이상의 급격한 성장을 이룬 70년대 코스모폴리탄의 처참한 말로를 그린 영웅도 기적도 드라마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깔끔한 클래식 호러 말이다. 재난 영화든 호러 영화든 그 사건의 발단은 보통 인간 스스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결말의 중심에서 어김없이 부각되는것은 서로를 보듬고 감싸안는 인간과 인류애이고  필요에 따라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하는 모래알 같은 그런 인류애가 가장 필요로 하는것은 괴물, 몬스터, 악의 무리 같은것이다.  내 생각에 재난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는 단 하나이다. 인간은 절대로 적과 함께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종족이 아니라는 것.  그 메세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최고의 영화는 바로 가레쓰 에드워즈의 저예산 SF <Monster>.  하지만 이 영화 일기가 <Monster>에 대한것은 아니고 그냥 저 장면의 공포스러움이 딱 <Monster> 식의 공포다 이거다.  진정한 에너미, 인간의 근원적인 적은 인간의 에고라는 메세지는 어쩌면 꽈고 꽈서 뒤집어 보아도 유사하다. <Shame>식의 차가움과 자조. <Monster>식의 공포와 냉소.  <아이즈 와이드 셧>의 비밀스러움과 퇴폐 <아메리칸 사이코>의 위선과 부조리를  데이비드 린치 혹은 크로넨버그를 추종하며 자란 아이가 만든 영화 같은 <Enemy>.  제이크 질렌할이 아담과 안토니, 1인 2역을 연기했지만 사실 하나의 자아를 연기했다고 해도 옳다.  찢어진 사진이나 6개월이라는 공백. 엄마와의 대화등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찾아 낼 수 있다. 아담의 제이크 질렌할이 <도니 다코> 속 도니 느낌이 들었다면 안토니의 제이크 질렌할은 <러브 앤 아더 드럭스>의 그 약장수를 닮았다. 걸친 옷과 눈빛만 조금 바뀌었을뿐인데 이토록 다른 두명이 될 수 있다니.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이의 존재를 알고났을때의 공포는 이내 상대가 가진것을 탐하는 원초적 욕망으로 탈바꿈한다.





대학 건물의 거대한 노출 콘크리트. 햇살에 무방비로 노출된 텅 빈 벤치. 빛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극도로 절제된 색감.  경이로운 대자연을 지척에 두고 콘크리트 성냥갑속에서 먹고 배설하며 살기위해 발악하는 우리들을 조곤조곤 보여줬던 <Samsara> 나 <Baraka>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특히나 흡사한 이 장면. 모든 이의 욕망이 범벅된 도시의 빌딩 숲과 유사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래성같은 도시 아담이 안토니가 소속된 영화사를 찾아가는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는 토요일 오후의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어두운 아파트 속의 무기력한 아담의 모습은 마치 <인섬니아>의 알래스카에서 불면증을 겪는 알 파치노를 닮았다.  내부에서 충돌하는 서로 다른 두 자아를 용납할 수 있느냐의 문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열쇠.   인기척없는 이른 아침에 의도적으로 촬영된 듯한 비밀스러운 고요함과 선글래스 혹은 헬맷속에 숨겨지는 욕망.  제이크 질렌할 대신 마이클 패스벤더나 크리스쳔 베일이었어도 아마 잘 어울렸을거다.










반응형